오늘은 캐디 인생에 평생 남을 역대급 수요일이었답니다. 앗, 오늘 월요일이죠? 주말 지나고 월요일이라 안 그래도 몸이 천근만근인데 날씨까지 이 모양이니 제가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오늘 아침에 출근해서 하늘을 보는데 정말 앞이 캄캄하더라고요.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장대비가 주룩주룩 내리는데, 이 정도면 보통 예약이 다 취소되거나 전반 홀만 돌고 '홀아웃 게 상식이거든요. 게다가 오늘 제 카트에 모셔야 할 분들이 무려 '사모님 네 분'이라는 명단을 확인한 순간, 속으로 '아, 오늘 하루는 정말 가시방석이겠구나' 싶었습니다.
보통 사모님들은 옷 젖는 것도 싫어하시고, 잔디에 물 고여서 신발에 흙탕물 튀는 걸 정말 질색하시거든요. 비가 조금만 부슬부슬 내려도 "오마이갓, 오늘 골프 못 치겠다. 그냥 그늘집에서 막걸리나 마시고 갈까?" 하시는 게 일반적인 풍경이니까요.
최근에 생긴 말로 공주님 네 명이라고 해서 “오늘은 공포 라운드다”라고 하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웬걸요? 오늘 제가 모신 네 분의 사모님들은…. 제가 그동안 알던 분들과는 차원이 다른, 그야말로 필드의 잔다르크, '멘탈 프로' 급 사모님들이셨습니다. 이 폭우 속에서 18홀을 단 한 홀도 건너뛰지 않고 싹 다 완주하셨다니까요! 오늘 필드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 카트에 같이 타신 것처럼 생생하게 얘기해 드릴게요. 들어보세요!
#1. 스타트 하우스에서의 첫 만남, "캐디 언니, 우린 고(Go)야!"
아침 8시, 비가 카트 지퍼를 뚫고 들어올 기세로 쏟아지는데 저 멀리서 화사한 비옷을 맞춰 입으신 사모님 네 분이 런웨이 걷듯이 걸어오시더라고요. 속으로 '제발 취소해 달라고 하셔라.' 하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대장 격이신 왕언니 사모님이 제 손을 꽉 잡으시며 호기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캐디 언니! 오늘 우리 취소 안 해. 한 달 전부터 겨우 시간 맞춰서 모인 멤버인데 비 따위가 우리를 막을 수 없지! 우린 무조건 18홀 완주할 거니까 언니가 고생 좀 해줘~ 대신 우리가 팁 두둑이 챙겨줄게!"
최 사모님: "맞아, 캐디 언니! 나 오늘 남편한테 애들 완전히 맡기고 큰소리치고 나온 월요일이란 말이야. 날이 부러져도 난 오늘 18홀 다 돌고 들어갈 거야!"
이 사모님: "어머, 박 프로(왕언니)! 언니 비옷 핑크색 너무 잘 어울린다. 비가 오니까 오히려 잔디가 더 파랗고 운치 있지 않니? 난 너무 신나!"
사모님들이 서로를 '박 프로', '최 프로'라고 부르시며 벌써 전의를 불태우시는데, 그 포스에 압도돼서 저도 모르게 지퍼를 단단히 채우고 무전을 쳤죠. "경기과, 저희 조 출발합니다!"
#2. 전반전, 빗속을 가르는 사모님들의 나이스 샷!
1번 홀 티박스에 섰는데, 세상에 비바람 때문에 우산이 뒤집어질 지경이었습니다. 제가 얼른 마른 수건으로 드라이버 그립을 닦아서 전해드렸죠.
"박 프로님, 비가 많이 와서 그립이 미끄러우니까 가볍게 툭 치셔야 해요!"
박 사모님(왕언니): "걱정하지 마, 캐디 언니! 내가 이래 봬도 수중전 경력만 10년이야. 언니는 공 나가는 방향만 잘 봐줘!"
깡~! 하고 경쾌한 소리가 나는데, 우와! 공이 빗줄기를 뚫고 페어웨이 정중앙을 일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겁니다. 사모님들이 일제히 "어머 어머, 박 프로 샷 좀 봐! 나이스 샷!" 하고 소리를 지르시는데, 비 오면 공이 안 구른다고 다들 유틸리티랑 우드를 잡고 아주 악착같이 공을 치시더라고요.
가장 막내이신 정 사모님 공이 벙커에 빠졌을 때는 정말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벙커에 물이 고여서 거의 미니 해수욕장 같았거든요. 제가 "사모님, 물이 너무 많이 고였으니 빼서 치세요"라고 정중하게 안내해 드렸어요.
그런데 정 사모님이 눈을 반짝이시며 "언니, 무슨 소리야! 우리 오늘 정식 룰대로 치기로 내기했단 말이야. 벙커 샷도 프로처럼 탈출해야 진짜지!" 하시더니 샌드웨지를 잡으시더라고요. 그리고 빗물과 모래를 사방으로 튀기며 퍽! 쳤는데 공이 그린 위에 탁 안착하는 겁니다. 순간 동반자 사모님들이 "어머, 정 프로 대박! 완전히 LPGA 실황 중계 보는 줄 알았잖아!"하면서 서로 하이 파이브를 하시는데, 비에 젖은 장갑에서 찰팍! 소리가 나도 마냥 싱글벙글이셨어요.
#3. 그늘집에서의 작전 타임, "따뜻한 정종 한 잔씩!"
그렇게 온몸이 다 젖어가며 전반 9홀을 겨우 마치고 스타트 하우스(그늘집)로 들어왔습니다. 네 분 다 머리는 젖어서 착 가라앉고 비옷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도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더라고요.
최 사모님: "어휴, 9홀 돌았는데 벌써 온몸에 에너지를 다 쓴 것 같아. 여기 따뜻한 정종 네 잔하고 부추전 빨리 좀 주세요. 우리 막내 정 프로가 아까 벙커 탈출 기념으로 쏘는 거야!"
정 사모님: "언니들, 저 오늘 빗속에서 치니까 오히려 힘이 빠져서 공이 더 잘 맞는 것 같아요. 후반전에는 언니들 돈 다 내 거야, 긴장들 해!"
이 사모님: "얘 좀 봐라? 정 프로, 아직 언니들의 무서움을 모르는구나. 후반전에 비 더 온다는데 우리 아주 진흙탕 싸움 한번 해보자고!"
따뜻한 정종 한 잔에 전을 드시면서 수다를 떠시는데, 영락없는 소녀들 같으시다가도 골프 이야기만 나오면 눈빛들이 다시 '프로 골퍼'처럼 변하시더라고요. 다른 팀들은 비 온다고 다 집으로 도망가서 그늘집이 텅텅 비었는데, 우리 사모님들만 방을 통째로 빌린 것처럼 화기애애하셨습니다.
#4. 후반전, 웅덩이 그린을 지배하는 자가 승리한다
후반전에 접어드니 비가 더 굵어졌습니다. 그린 위에는 이미 캐주얼 워터(물이 고인 상태)가 가득해서 공을 굴리면 중간에 분수처럼 물을 뿜으며 멈춰 서버리는 최악의 상황이었죠. 제가 그린 라이(공이 굴러갈 길)를 보려고 해도 물 때문에 라인이 전혀 안 보였습니다.
"사모님들, 지금 그린에 물이 너무 많아서 라이 보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죄송해요."
박 사모님: "언니가 왜 미안해! 이럴 때는 라이고 뭐고 없어. 홀컵 뒷벽을 친다는 느낌으로 직선으로 강하게 때려야 해. 자, 내가 먼저 시범을 보여주지!"
박 사모님이 퍼터를 잡고 거의 아이언 샷을 하듯이 쾅! 치시니까 공이 물을 가르며 좌르륵 굴러가더니 홀컵에 쾅! 하고 박히더라고요.
네 분 일제히: "나이스 버디!!! 대박!!"
비 오는 날 필드에서 사모님들 비명 섞인 환호성이 울려 퍼지는데, 제가 다 소름이 돋더라니까요. 비가 오면 불쾌지수가 높아져서 캐디한테 짜증을 내거나 동반자끼리 예민해지기 쉬운데, 이분들은 서로 물을 뒤집어쓰면서도 빗속의 플레이 자체를 완전히 즐기고 계셨습니다. 이 사모님 신발에 물이 들어가서 걸을 때마다 찍찍 소리가 나니까 서로 "어머, 이 프로 걸어 다닐 때마다 음악 소리가 나네?" 하면서 배를 잡고 웃으시더라고요.
#5. 18번 홀의 감동적인 홀아웃과 "캐디 언니 최고!"
드디어 마지막 18번 홀. 네 분 다 온몸이 흠뻑 젖어 비옷이 몸에 착 달라붙은 상태였지만, 마지막 티샷까지 정말 프로처럼 멋진 템포로 날리셨습니다. 마지막 정 사모님의 퍼팅이 홀컵 속으로 땡그랑 떨어지는 순간, 네 분이 우산을 내팽개치고 그린 한가운데서 서로를 껴안으며 소리를 지르시더라고요.
"우리가 해냈다! 이 폭우를 뚫고 18홀을 다 돌았어!"
그리고 저에게 다가오셔서 제 손을 꼭 잡아주셨습니다.
박 사모님: "캐디 언니, 오늘 우리 때문에 진짜 고생 많았지? 비 와서 채 닦으랴, 우산 받쳐주랴 언니가 제일 힘들었을 거야. 오늘 언니의 완벽한 서포트가 없었으면 우리 중간에 도망갔을지도 몰라. 정말 고마워!"
그러시면서 제 주머니에 축축하게 젖었지만 마음이 가득 담긴 팁 만 원짜리 몇 장을 쏙 넣어주셨습니다. 클럽하우스로 돌아가는 카트 안에서 사모님들은 "오늘 월요일부터 아주 액땜 제대로 했다", "이번 주 내내 무슨 일이든 다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라며 서로를 격려하셨죠.
오늘 정말 힘들긴 엄청 힘들었거든요? 옷도 다 젖고 골프화도 망가졌지만, 비 오는 필드 위에서 그 어떤 프로 선수들보다 더 멋진 매너와 열정을 보여주신 사모님들 덕분에 제 캐디 인생 중에서 가장 보람차고 유쾌한 수중전이었습니다. 진짜 골프를 사랑하는 진정한 '프로 사모님들'의 하루, 정말 대단한 라운드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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